‘아이스하키’라 하면 남성적이고 과격한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하다. 게다가 ‘아시아리그 최초 한국인 MVP’, ‘국내 아이스하키 최고 연봉 선수’라는 엄청난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포스 넘치는 사나이일까. 그런데 실제로 만난 김기성 선수는 그냥 교회에서 흔히 만나는 ‘교회 오빠’ 같은, 너무나 훈훈한 선수이자 크리스천이었다. 인터뷰 장소로 이동하자 그가 순둥순둥한 눈을 하곤 묻는다. “모태신앙이세요?” 그러고는 부럽다는 눈으로 쳐다본다.
취재 | 한경진 기자 사진 | 한치문 기자
sena 모태신앙을 부러워하시는 걸 보니 신앙생활을 어릴 때부터 하진 않으셨나 보네요?
김기성 중고등학교 때부터 신앙생활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저는 대학교 1학년 때 선배가 전도를 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대학 때 캐나다로 한 달 동안 전지훈련을 간 적이 있는데, 당시에 숙소에서 제가 막내라 매일 설거지하고, 사람들 양말 빨고 하면서 엄청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주일날 한인교회에 가면 자유시간을 가질 수 있고 한국 음식도 먹을 수 있고 해서 다니기 시작했어요. 처음 교회에 다닐 때는 운동이 너무 힘들어서 뭔가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다녔던 것 같아요. 그때는 뭐 교회에 왔다갔다 하면서 하늘에 대고 비는 정도였죠. “운동 좀 잘하게 해 주세요” 하면서요.
sena 처음 해 본 교회 생활은 어땠어요?
김기성 저는 뭐 하나에 꽂히면 제대로 몰입하는 스타일이에요. 그래서 교회에 다니면서도 어떻게 해야 맞는 건지 의문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같이 교회에 다니던 형들이 밖에 나가서는 술자리를 좋아하고 욕도 엄청 잘하는 걸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신앙인은 저런 게 아닌데’라는 생각에 헷갈리고 힘이 들었죠. 그런 상태로 대학 4년 동안 교회에 다녔어요.
sena 운동하는 것도 힘든데 신앙적으로도 고민이 많아서 더 힘들었겠어요.
김기성 정말 힘든 시기는 미국에서 선수생활을 할 때였어요. 한국에서 성적이 괜찮은 편이라 하키 강국에서 제대로 해보고 싶은 마음에 미국으로 건너갔죠. 그런데 미국 팀에서 딱 두 게임 뛰고는 말 그대로 짤리게 됐어요. 미국은 워낙 잘하는 선수들이 많아서 한두 경기 만에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기회조차 주지 않거든요. 그런데 원래 이런 경우에는 숙소에서도 바로 나와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팀에서 6개월 동안 숙소를 사용하게 해줬어요. 그때 만난 룸메이트가 미국인 친구였는데 되게 독특한 친구였어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요. 아침 훈련이 끝나면 점심을 먹고부터는 저녁까지 TV 한 번도 켜지 않고 설교 말씀만 들어요. 또 매주 수요일에는 팀에서 교회 다니는 친구들을 모아서 같이 예배드리고 상담도 하고요. 굉장히 신실한 친구였죠. 그리고 미국은 시합이 끝나면 맥주를 마시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였는데, 그 친구는 그곳에 가서도 절대 술을 안 마시더라고요. 시합을 하러 가는 차 안에서도, 경기장에 가서도 항상 말씀 보고 있거나 기도노트를 적곤 했어요.
sena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와는 정 반대의 사람을 보여주신 거네요?
김기성 아주 극과 극을 보여주신 거죠. 당시에 둘이 방을 같이 썼기 때문에 저도 덩달아 아무것도 못하고 한국에 있는 목사님들의 설교 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졸기도 엄청 졸았죠(하하). 그때 저는 팀에서 짤렸으니까 월급이 없었는데, 또 먹기는 엄청 많이 먹어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장을 봐야 했어요. 그런데 제가 돈을 내려고 하면 그 친구가 “여기에 있는 동안은 내가 다 내겠다”며 저를 챙겨주었어요. 심지어는 제가 한국으로 돌아올 때 1달러, 5달러 짜리 지폐 여러 장을 동그랗게 말고 고무줄로 묶어서 선물로 주더라고요. 거기에 번역기를 돌린 어설픈 한국말로 이렇게 썼어요. ‘니가 나중에 한국에 가서 성공해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될 때 이 돈을 써’라고요. 너무 고마웠죠. 그 돈은 아직도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나중에 미국에 가게 되면 그 친구에게 다시 주려고요.
sena 선수로서 좌절감이 엄청났을 시기 같은데, 그 친구의 존재가 많은 도움이 됐나요?
김기성 좌절감이 엄청났죠. 자존심도 상하고요. 그런데 제가 매일 기도할 때 한숨 쉬는 걸 보더니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어주셔야 해. 니가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에이전트를 찾으려고 해봤자 안 될 거야. 하늘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해”라고요. 당시에 제가 어떻게든 팀을 구해서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치는데도 계속 안 되는 상태였거든요. 사실, 그때는 그 친구 말을 듣기가 쉽지는 않았어요. 상황이 너무 안 좋았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하나님이 힘 빼기 훈련을 시키셨던 것 같아요.
sena 그렇게 힘 빼기를 하는 과정이 왜 필요했을까요?
김기성 사실, 미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하키를 잘해서 돈 많이 벌고 성공해야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물론 지금도 선수로서 목표가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때는 돈, 명예를 얻으려는 욕심이 아주 많았죠. 그런데 미국에서 두 경기 만에 실패하고, 그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그런 생각들을 많이 내려놓게 되었어요.
sena 그러면, 그 일 이후에 어떻게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신 건가요?
김기성 마침 그 무렵에 평창에서 올림픽이 열리기로 확정되면서 ‘상무’라는 국군체육부대에 아이스하키 팀이 만들어지게 됐어요. 선수들이 2년 동안 군생활을 하면서 운동을 쉬면 회복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군에서도 선수들의 기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팀을 만든 거죠. 만약 그게 아니었으면, 저도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와야 할 뻔했어요.
...김기성 선수의 간증 인터뷰는 sena 매거진에서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