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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보이지 않아도 나에게 꿈이 있다면
버클리음대 시각장애인 김치국 교수 | 2015년 08월호
  • 온 나라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로 뒤숭숭하던 6월. 국내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행사들이 취소가 되는 와중에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미국 버클리음대의 최연소 전임교수이자 시각장애인 연주자인 김치국 교수가 메르스 때문에 한국에서의 일정이 취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귀국한다는 소식이었다. 말로만 듣던 그의 음악을 직접 들을 수 있다니! 이 기회를 놓칠세라 서울에서 연주 일정이 있는 경주까지 5시간 걸려 차를 몰고 달려갔다. 그리고 경주의 한 교회에서 열린 작은 연주회에서 따뜻한 음악과 함께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경진 기자·사진 | 한치문 기자 

    “저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네 살 때 시력을 잃었고, 17살 때 그나마 보였던 빛도 전혀 안 보이게 됐어요. 신기한 게 세 살 이전까지 보였던 게 생각날 법도 한데, 저는 아무 기억이 없어요. 어떻게 보면 축복인 것 같아요. 보는 게 어떤 건지 모르니까 아쉬움도 없잖아요.”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했던 아이. 만 3세가 되지 않으면 심장 수술을 받을 수조차 없어 숨이 가빠 올 때마다 병원에 입원하기를 반복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아이, 그가 바로 꼬맹이 시절의 김치국이다. 드디어 네 살이 되던 해 그렇게 고대하던 심장 수술을 받게 되지만, 수술 후유증으로 점점 시력이 나빠져 결국 제대로 손도 써 보지 못한 채 그는 앞을 볼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시각장애인으로서의 삶. 그는 물론 가족에게도 ‘고난’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뼛속까지 믿음의 사람이었던 그의 가족들은 이 고난 앞에서 최고의 팀워크를 발휘했다. 밤낮없이 기도하는 부모, 자기 일보다 동생의 일을 먼저 돌봐주었던 두 명의 누나들. 그들의 큰 사랑과 헌신 덕분에 그의 어린 시절은 암울하기보다는 오히려 무한긍정에 가까웠다. 호기심 많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뭐든지 해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의 성격을 그대로 받아주었던 그의 부모는 “치국아, 넌 눈이 보였으면 큰일 날 뻔했다”라며 뒤늦게 심경고백(?)을 했다고. 그러나 그는 자신의 긍정적인 성격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말한다. 그런 성격을 주셔서 장애라는 벽을 쉽게 극복하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매진하던 제가 사춘기 시절에 ‘컴퓨터’라는 신세계를 알고 거기에 빠지게 되었어요. 피아노를 계속 하기 원하셨던 어머니와 엄청난 갈등과 다툼이 있었지요. 그런데 결국 하나님께서는 제가 좋아하는 피아노와 컴퓨터를 합쳐주시더라고요.”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시작했다는 그는 실력이 보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대통령과 정부, 교육계의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피아노 콩쿠르에서 1등을 할 정도였다니 말이다. 그도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피아노를 통해 처음으로 음악과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 사랑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에 부딪치고 말았다. 고지식하고 엄격한 피아노 선생님을 만나 일편단심 피아노에 쏟았던 흥미를 싹 잃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흥미와 관심은 그대로 ‘컴퓨터’로 옮겨갔다. 내 마음대로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지울 수 있고,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PC 통신으로 대화를 할 수 있는 신세계를 맛보고 만 것이다. 결국 공부도 피아노도 뒷전으로 미뤄버린 채 밤새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통에 그는 시시때때로 부모님과 말다툼을 해야만 했다. 피아노보다 컴퓨터가 더 좋은 사춘기 소년과 피아노를 잘 배워서 가르치는 직업이라도 갖게 되기를 바라셨던 어머니와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서로 찌르고 아파하며 평행선을 달리는 두 사람에게 교차점을 만들어 주셨다. 실용음악의 최고 교육기관인 버클리에서 컴퓨터를 활용한 음악을 만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음악으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오래 전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주시고, 이어서 컴퓨터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감각을 부어주셔서 이 분야에 쓰임받도록 그를 만들어 가고 계셨던 것이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박스를 더 넓혀서 다른 사람이 박스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아니 박스를 아예 부숴서 모두가 박스 없이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예수님도 그런 사회를 사랑하실 것 같아요.”

    그러나 그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단 한 번도 뭔가를 하는데 주저한 적이 없다. 그가 가야할 길이면 주님이 열어주실 것이고, 아니면 막으실 거라는 단순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그가 유학했던 미국이라는 나라는 그가 자신의 재능을 펼치며 마음껏 살아나가기에 정말로 좋은 곳이었다. 한번은 나름대로 우여곡절,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그에게 한 교수가 충격적인 이야기로 그를 격려했다. “만약 네가 사막에 혼자 살게 된다면 그곳의 환경은 모두 너를 위주로 만들어지게 될 거야. 그곳에서 너는 장애인이 아닌 정상인인 거지. 그런데 우리 사회는 정상인을 위주로 박스를 만들어놓고 그 안에 적응하면 정상인, 적응하지 못하면 비정상인, 장애인이라고 구분을 해. 그러니까 결국 장애라는 건 사람들이 만들어낸 개념에 불과한 거야.” 장애는 ‘나’의 문제가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교수의 이야기는 죽을힘을 다해 노력을 해야만 세상에 적응할 수 있었던 그에게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박스 넓히기 작업’에 푹 빠져 있다. 버클리음대의 최연소 교수이자, 시각장애인 전문 교수로서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학생들에게 그가 통과해 온 과정을 공유하고, 가르치면서 말이다. ‘사회’라는 박스 안에서 장애 학생들이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환경과 영역을 점점 넓혀가는 작업,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음악이라는 도구를 주신 이유이자 소명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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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박하늘  2015-08-18
와... 대단한 분이십니다. 저도 저렇게 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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