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주인공의 이름을 어떻게 쓰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방송인 김송’ 또는 ‘댄서 김송’, 그냥 ‘김송’.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했지만, 인터뷰 끝에 새나 독자들에게 직접 쓴 자필 사인에 ‘클론 강원래 마누라 송’이라고 쓰시는 것을 보고 바로 결정했다. 조금은 길고, 어색하지만 ‘클론 강원래의 아내 김송’이라고. 4월의 랜덤인터뷰는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라는 장애를 가지게 된 클론 강원래 씨의 아내, 김송 자매님을 만나보았다.
취재/ 김형민·사진/ 정화영 기자
요즈음 교회에서 은혜를 듬뿍 받고 계시죠?
네. 너무 은혜 받고 있어요. 울고 웃으면서 목장 식구들과 함께 은혜를 나눠요. 목사님 말씀도 너무 좋구요. 말씀을 통해서 제 삶을 해석 받으면서, 너무 감사해서 눈물 밖에 안나요. 최근에 어머니가 아프시고 결국 돌아가셨지만, 그 과정을 통해서 많은 은혜를 받았어요. 제가 다니는 교회는 김양재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우리들교회라는 곳인데, 너무 좋은 교회에요. 전교인 앞에서 어머니가 구원받으신 내용과 제 삶을 담은 세례간증도 했어요.
TV에서 어머니의 투병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았습니다. 옆에서 병상을 지키시면서 마음이 많이 아프셨겠어요.
어머니는 교회에서 구역장까지 하시고, 방언으로 기도하시던 그런 분이셨어요. 그런데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이혼하시면서 믿음을 잃어버리시고, 불교로 개종을 하셨죠. 지금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머니의 환경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게 만들었나 봐요. 그 일 때문에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어머니를 버리지 않으셨죠. 홀로 지내시다 호주에 가셔서 호주분과 재혼을 하셨는데, 그러던 중 96년 1월에 뇌종양 판정을 받으시고, 투병생활을 시작하셨어요.
그 과정에서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셨나 봐요.
목사님의 심방을 받으시고, 어머니는 그날 저녁 바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셨어요. 살려달라고 기도하시기보다는 회개하시면서 오늘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셨어요. 그 후에 병은 점점 심해지셨고, 결국엔 한국으로 오셔서 돌아가셨지만 마지막 모습은 너무나 평안해 보이셨어요. 어머니께서 천국에 가셨다고 확신해요. 이 과정에서 제 신앙도 많이 회복이 되었어요.
강원래 씨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저희 4남매는 많이 힘들 수밖에 없었고, 저는 공부보다는 춤이 좋아서 나이트클럽을 다니곤 했었죠. ‘춤 날나리’였다고 봐야죠. 그때 강남과 이태원의 클럽을 다니면서 춤을 추었는데, 그곳에서 너무나도 춤을 잘 추는 사람을 봤어요. 그게 원래 오빠였죠. 그렇게 오빠를 알게 되었고, 친하게 지내다가 사귀기 시작한 것은 원래 오빠가 군대를 갔던 91년도 부터였어요.
자매님도 춤을 잘 추셨잖아요?
원래 오빠가 93년에 제대를 하고, 본격적으로 김건모, 신승훈, 박미경, 노이즈 같은 분들의 안무를 짜주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오빠는 클론을 결성했고, 저는 김건모 씨의 핑계라는 노래에 ‘핑계걸’로 활동하다가, 96년에 콜라라는 혼성그룹으로 활동하게 됐어요. 거기에서 저는 랩과 춤을 담당했죠. 그런데 원래오빠는 ‘쿵따리 샤바라’로 완전히 떴고, 저는 망했어요. 너무 앞서가는 음악이었거든요.
잘나가던 강원래 씨가 사고를 당하신 게 2000년이었죠?
2000년 11월 9일이었어요. 오빠가 자신이 장애를 가진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죠. 그토록 열정적으로 춤을 추던 오빠에게 하반신 마비라는 현실은 너무나도 가혹했죠. 그런데 2001년 어느날 집 앞에서 넘어진 오빠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에 들어와서는 어린시절 출석했던 교회의 목사님을 찾더라구요. 그때 어렵게 연락이 닿아서 한동안 그 목사님의 개척교회에 오빠와 함께 다녔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기복적인 신앙수준이어서 저희가 준비했던 시험관 아기가 실패하자 실망해서 그 교회를 나가지 않았죠.
요즈음 강원래 씨의 신앙은 어떤가요?
아직 믿음이 없다고 봐야죠. 하지만 제가 교회에 다니고,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을 말리지는 않아요. 오빠에게 아주 흐릿한 믿음은 있는 것 같지만 아직 진정한 변화는 찾아오지 않은 것 같아요.
최근에 또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는데 오빠에게 “하나님이 살려주신 거야”라고 말하니까 받아들이는 듯 하더니, 사람들이 찾아오자 “에어백이 나를 살렸다”고 말하더라구요. 제가 얼마나 낙심했는지 몰라요. 남편의 변화는 더디지만 언젠가는 변화되리라고 믿어요.
남편을 위한 기도가 많이 필요하겠어요.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많이 배워요. 내가 워낙 죄가 많은 사람이라 힘들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 않으니까 낮아지게 하시고, 힘들게 하는 분들을 붙여주셔서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는 것 같아요. 그렇기 때문에 주의의 모든 분들은 제가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서 수고하시는 분들이죠. 그래서 그분들께 감사하게 돼요.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힘이 돼요.
고난은 변장된 축복이라는 말씀이 귀하게 들리네요.
원래 오빠가 사고가 나고, 때론 영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고, 엄마가 병을 얻으셔서 천국에 가시는 그 과정을 통해서 저는 하나님 앞으로 나가게 되었어요. 제가 원래 오빠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절망 중에도 저희 가정에 찾아오실 주님을 기대하기 때문이에요. 요즈음은 사도바울을 많이 묵상해요. 사도바울에게 있는 육체의 가시는 고쳐주지 않으신다고 하셨잖아요. 하지만 그 가시 때문에 더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바울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오빠가 성격도 평범하지 않고, 때론 가족을 힘들게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래 오빠를 사랑하고 계심을 믿고 기도해요.
김송 자매가 옆에 있는 강원래 씨의 앞으로의 삶이 기대되는데요.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으면 저희 가정은 어려웠을 거예요. 요즈음은 용서하면서 살아요. 저를 힘들게 했던 분들께 용서의 메시지를 보내고 예수님을 소개해요. 그리고 오빠가 천안에 있는 기독교대학인 나사렛대학교의 재활학부에 강의를 나가게 되었어요. 정말 돈이 안되는 일이지만, 학교의 권유에 못이겨 오빠가 허락을 했어요. 믿음이 없는 남편이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남편의 사역이 기대돼요. 저도 남편이 강의 갔을 때, 맘껏 기도하고, 말씀 보면서 영적으로 후원하려고 해요.
힘든 청소년시절을 보내셨는데, 이 기사를 보는 청소년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교회에서 말씀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청소년들을 보게 돼요. 하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설교시간에 떠들더라도 절대로 빠지지 않고 꾸준히 나와서 말씀이 선포되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언젠가는 들리게 되는 날이 올 거예요.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연신 눈물을 쏟아내는 김송 자매의 순수한 신앙을 보면서 인터뷰를 지켜보던 다른 스텝들도 함께 은혜를 받았다. 아무쪼록 김송 자매의 기도가 응답되어 가정, 특히 강원래 씨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쓰임받는 삶을 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