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국회는 언제나 분주하다. 의원회관 202호 장향숙 의원실을 찾은 그 날. 인터뷰가 예정된 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자 일행은 인터뷰를 뒤로 미루고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시각장애인 관련 문제로 시각장애인들이 한강다리에서 투신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장향숙의원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 비례대표 1번, 생활보호대상자, 무학력, 한쪽 팔과 두 다리가 온전하게 자라지 못한 여성장애인 인권운동가 출신, 장향숙 의원을 만나보았습니다.
취재/ 김형민, 사진/ 안유선 기자
알고보니 청소년사역을 하셨더라구요.
네, ‘영 라이프’라는 청소년모임을 했어요. 부산에서 했는데 아는 권사님께서 장소를 제공해 주셔서 자발적으로 모임을 갖게 됐죠. 책도 읽고, 상담도 하고, 성경공부도 하는 기독교 청소년 모임이었어요. 그때 모임 했던 친구들이 지금은 장성해서 다 나름대로 사회에서 한몫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청소년 월간지인 ‘새벽나라’에서 오신다고 하니까 더 반가웠죠.
그러셨군요. 주로 부산에서 신앙생활을 하셨나봐요.
부산에 있는 소정교회가 제 모교회에요. 요즘은 국회의원 생활을 하다보니 떠돌며 예배를 드릴 때가 많지만, 부산 소정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쭉 해왔죠. 남동생은 현재 부산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어요.
가족들도 모두 신앙생활을 하시나요?
그럼요. 제가 5남매 중 3째 딸인데, 친가, 외가 모두 증조부 때부터 신앙생활을 하신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어려서부터 가정예배를 드렸고, 부모님의 기도를 받으면서 자랐죠.
결혼하시는 장애인 분들도 많으시던데 장의원님은 왜 아직 결혼을 안 하셨나요?
제가 58년 개띠인데요. 대한민국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나이라고 하더군요. 동료 의원들도 저와 동갑되시는 분들이 많아요. 소위 베이비 붐 시대에 태어난 또래들인데 많이 태어난 만큼 많이 죽기도 했어요. 특히, 제가 두 돌이 되던 해에 소마마비가 퍼졌었어요. 그러면서 건강하던 제가 그만 소아마비에 걸려서 땅에 주저앉고 말았죠. 그렇게 자라나 어른이 되고, 솔직히 말해서 연애도 하긴 했었어요. 하지만 ‘내가 한 사람의 아내로 사는 것 보다는 장애인을 위해서 일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이 항상 컷어요. 그래서 제 에너지를 여성장애인 인권운동에 쏟다 보니까,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고 살게 된 것 같아요.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한국사회에서의 장애인은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과거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생산성이 없다보니 소외되기 일쑤였고, 사회적으로 격리되면서 가족의 짐이 되었죠. 그래서 많은 장애인들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놓고 고통스러워하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돕는 사람들, 장애인이 살아갈만한 세상을 만드는 누군가가 필요한거죠. 저는 바로 그 일을 해 온 거예요.
국회의원으로서 장애인을 위해 일하시면서 어떤 것을 느끼시나요?
국회에서 일을 해보면서 뭐든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현실의 벽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달라지고 있어요. 많이 좋아지고 있죠. 그렇기 때문에 제가 국회의원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해보려 합니다.
처음에 의원직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지만, 장애인들을 위해서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죠. 제 개인적인 욕심은 없습니다. 다만, 이 사회가 저 같은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세워줄 만큼변화하고 있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외국의 경우 장애인 정책이 잘 발달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맞습니다. 미국의 경우 장애인이 사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강력한 장애인지원법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장애인이 정상인과 같은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예산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그들이 정부가 주는 생활보조금을 받고 무능력하게 사는 것보다 세금을 내는 사회인으로 살도록 도와주면 오히려 더 정부의 재정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하에 그 법을 실행하고 있는 거거든요. 다만 우리나라에 그런 강력한 장애인 정책이 도입되기 위해서는 재정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경제발전과 정치발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회의원 임기 후에는 어떻게 보내실 생각이세요.
국회의원직에 연연해 하지는 않습니다. 지금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직도 수행하고 있는데 임기 후에는 그 역할을 더 충실히 해야할 것 같아요. 임기후의 일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죠. 다만 개인적으로는 쉬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좋아 하는 책도 읽고, 건강도 돌봐야 할 것 같아요. 국회의원 생활은 생각보다 정말 힘들거든요. 그리고 신앙생활도 더 잘 해보고 싶어요. 저 같은 소아마비 장애인은 척추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대게 약 60세 정도를 살게 돼요. 저도 곧 50세가 되니까, 나머지 10년 정도는 하나님 앞에 갈 준비를 하면서 삶을 잘 정리해야 할 것 같아요.
너무나 당당하세요. 어떤 마음으로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셨나요.
요즈음 세상이 너무 예쁘고 화려한 사람들만이 각광 받는 세상이라 그렇지 못하거나 실제로 멋진데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청소년들이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이의 평가에 자신의 존재를 얽매이게 하는 것은 너무 어리석은 일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느냐를 생각해야 하죠. 사람은 저마다 하나의 나무를 키운다고 생각해요. 내안의 나무를 키우는데 집중하면 어떤 어려움도 이길 수 있어요.
장애를 부끄럽거나 절망적으로 느끼신 적도 있으실텐데요.
저는 제 장애를 숨긴 적이 없습니다. 수퍼에 갈 때도 반바지를 입고 제 가는 다리를 드러내고 다녀요. 공중목욕탕에도 다녔어요. 바가지를 밀면서 목욕탕을 기어 다녔지만, 그래도 목욕을 잘 하고 왔죠. 물론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제가 자연스럽게 당당히 다닐 때, 이웃들도 저를 있는 그대로 봐 주시더라구요. 결국 장애 자체보다 자신의 장애를 보는 태도가 중요해요.
오늘날 장 의원님이 계시기까지 부모님과 가족들이 도움이 컷을 것 같아요.
저희 가정은 가난한 농부의 가정이었습니다. 물질적으로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신앙이 깊은 집안이었기에, 장애가 있는 저에게 편견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항상 저를 도와주었고, 사랑을 부어주었어요. 특히 할머니의 사랑을 잊을 수 없어요. 평생 말씀을 보셨던 할머니는 항상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면서 동행해 주셨어요. 제가 제 형편보다 훨씬 잘된 것은 모두가 이분들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믿어요. 지금도 할머니의 눈빛을 기억해요. 96세로 소천하실 때까지 참으로 맑은 눈빛으로 살다가셨어요. 저희 어머니도 지금까지 매일 새벽기도를 하시고, 하루에 3시간에서 4시간은 성경을 보시는 것 같아요. 진정한 신앙인이시죠.
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으신데, 무척이나 유식해보이세요.
그러세요? 말씀하신대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책을 참 많이 읽었어요. 책속에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성경도 많이 읽었구요. 제 독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라, 진정 읽고 싶은 독서였기 때문에 제 삶의 양식이 되었던 것 같아요.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진 않아요. 오히려 제가 장애인운동을 하면서 저의 무학력이 도움이 되는 것을 봐요.
만약 제가 부잣집에서 태어나 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면서 명문대학을 나왔다면 아무 힘도 없고, 장애 때문에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장애인들이 제 이야기를 들어줄까요? “저 사람은 우리랑 다르니까 그렇지”라고 얘기할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들과 똑 같았기 때문에 제가 장애인들에게 하는 말이 설득력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의원님과 청소년들이 만날 기회를 마련하고 싶어요.
당연히 만나야죠. 일정 문제만 괜찮으면 되도록 많은 청소년들과 부모님들을 만나고 싶어요. 저의 경험이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는 청소년들과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청소년들에게 도전이 된다면 좋겠어요. 저는 저의 고난이 오히려 강점이 되는 것을 봐요. 내 자신을 어떻게 보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보시느냐가 인생의 행복을 좌우하죠. 힘을 내세요. 청소년 여러분!
마지막으로 기도제목을 나눠주세요.
17대 국회를 마치고 나갈 때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남은 임기동안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장애인들과 저를 국회의원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부끄럽지 않으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겠죠. 그것이 저의 가장 큰 기도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