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따라 아름다워지는 것

prologue 2024년 12월호 때를 따라 아름다워지는 것 글 서진아

나이를 먹는다는 건 눈, 코, 입, 귀의 구실이 이전만 못 하고, 사지가 쇠하여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어지며, 총기가 흐려져 상대의 이름을 한 번에 부르지 못하는 상태에 다다르는 것임을 반박할 수 없다. 반면, 말 몇 마디로 상대가 나에게 독이 될지 득이 될지 가늠할 수 있고, 계량 없이 설탕, 소금을 던져 넣어도 원하는 맛을 찾을 수 있으며, 굳이 손으로 찍어 먹지 않아도 된장인지 뭐인지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나이가 주는 혜택이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굵어진 나이테에 걸맞지 않은 어리바리함이 잔존하는 구석이 있는데, 이상하리만치 음식 만들기에서만큼은 연륜이 쌓이지 않는다. 자신 있는 메뉴는 김치찌개와 카레, 달걀말이 정도이며, 단순해 보이지만 깊은 내공이 요구되는 국이나 나물은 몇 번의 실패를 맛본 이후 손을 놓아버렸다. 김치는 언감생심이다. 실패해서 버리느니 사 먹는 게 낫다는 자기 합리화에 힘입어, 이제는 맛있는 반찬집, 김치 브랜드에 안착했다. 

 

그런 평온한 일상을 뒤흔드는 사태가 일어났으니, 얼마 전 닥쳐온 배추 폭등 사건이다. 배추 한 포기에 몇만 원까지 치솟으며, 김치를 담글 수도 사 먹을 수도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비싼 값에라도 울며 주문을 했건만, 배추 수급이 어려워 판매가 중단되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비싼 배추로 김치를 담갔다가 실패하면 낭패이므로 위험을 최소화할 요량으로 깍두기에 도전했다. 미안하다 싶을 만큼 어마어마한 레시피가 블로그와 동영상으로 넘쳐났고, 솔직히 조리 과정이 너무 쉬웠다.

 

이게 될까 싶은 마음이 없진 않았으나, 하루 이틀 지나 기대에 부풀어 맛을 보았는데… 쓰다. 소금, 설탕 넣으라는 대로 넣었고, 요즘 핫하다는 조리 비법인 요구르트까지 부었는데, 단맛도 짠맛도 없고 그냥 쓰기만 했다. 망했구나, 난 역시 안 되는구나 싶었다. 낙심과 절망의 마음을 안고 매일 깍두기 통을 열어 맛보기를 이레, 여드레, 아흐레…. 응? 맛이 달라졌다. 단맛과 짠맛이 소생하고, 쓴맛은 소멸했다. 아, 눈물 날 만큼 맛있다!

 

서설이 길었지만, 부끄러운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은 ‘시간’이라는 가공할 힘이다. 

무, 고춧가루, 설탕, 소금이라는 ‘아는 맛’의 재료를 섞어, 전혀 새로운 맛을 만들어 낸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의 솜씨였다. 「빛과소금」 12월호를 기획하면서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하다가 ‘시간’이 탄생되었다. 시간은 덧없고 잡을 수도 없지만, 아무 맛도 없던 것에 맛을 더하는 힘이 있다. 그리고, 때를 따라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릴 줄 아는 지혜를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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